산문

[스크랩] 불교의 업(karman) samsara 9

할로태산 2012. 12. 3. 18:10

윤회이론

9. 불교의 업(karman)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윤회이론의 체계는 불교이전에 확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이론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윤회’를 주장한다. 따라서 불교의 윤회이론은 불교고유의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의 텍스트에 의하면 윤회는 三界와 五途라는 지극히 불교적인 우주관에서 전개된다. 欲界, 色界, 無色界의 단층구분이 수메루(sumeru)산 둘레에 펼쳐져 있다. 이 삼계는 삼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인간은 제일 아랫부분인 욕계에 속한다.

오도는 地獄(naraka)途, 餓鬼(preta)途, 畜生(tiryagyoni)途, 人間(manusha)途, 天(deva)途로 구분된다. 각 途(세계)는 전생의 업(karman)에 의해 결정된 결과이다.

불교윤회의 시작점은 찾을 수 없다. 모든 생명들은 그 시작이 없을 때부터 그 업이 소진할 때까지 3계와 5도를 떠돌게 된다.

경전 마하바스투(mahavastu)에서 부처는 “비구들이여, 나는 단 한가지 사실, 즉 업(karman)만을 가르친다”라고 했다. 그 만큼 부처의 가르침에서 업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 업이론은 불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불교에 와서 더욱 명확해지고 이 이론에 보다 큰 의미가 부가됐다.

불교만큼 업(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체계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사성제와 연기이론 그리고 팔정도도 업이론의 근간 위에 서있다.

텍스트에 의하면 업에는 善業, 惡業, 無記業등이 있다. 글자 그대로 선업은 좋은 결과를 초래하고, 악업은 나쁜 果報를 가져오고, 무기업은 어떠한 결과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무기업은 중성적인 것이어서 진정한 의미의 업이라고 할 수 없다.

불교에서의 업은 반드시 의도된 행위가 수반된 것을 말한다.
부처는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그 갚음을 받되 현세에서 받거나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는 반드시 그 갚음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아함”(3권15)- 라고 분명하게 하고 있다.

행동은 사람들이 원해서 몸이나 언어 또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부처의 말이다.

업의 구분은 몸(kaya)과 언어(vaca)와 마음(manas)의 업으로 나뉜다.

① 身業 - 殺生, 偸盜, 邪淫
② 口業 – 妄語, 綺語, 兩舌, 惡口
③ 意業 – 貪, 瞋, 邪見

이상 열 개로 구분되어 있으나 이것은 곧 10惡業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보다는 악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殺生(pranatipata) – 생명을 죽이는 것.
② 偸盜(adattadana) – 물건을 훔치는 것.
③ 邪淫(kamamithyacara) – 보호되어 있는 여자를 범하는 것.
④ 妄語(mrsavada) –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⑤ 兩舌(paisunyavada) – 이간시키는 말, 자신을 속이는 위선적인 말을 하는 것.
⑥ 惡口(parusyavada) – 욕, 추한 말을 하는 것.
⑦ 綺語(bhinnapralapa) – 꾸며대는 말,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뜻이 아닌 것을 말하고, 法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
⑧ 貪(abhidhya) – 남의 재물이나 그 외의 것을 엿보고 구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⑨ 瞋(vyapada) – 미워하고 성내는 것.
⑩ 邪見(mithyadrsti) – 개인적인 소견, 업과 과보를 믿지 않는 것.

업은 반드시 그 결과(果報)를 불러 일으킨다. 텍스트에서는 식물에 비유해서 업을 설명하고 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열리고, 익어서 떨어진다. 어떤 나무로 성장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씨앗에 달려 있다.

이처럼 업은 발생하고 나면 그 과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업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행하여 진 것이므로 본인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업을 전가 할 수 없다.

그러나 부처는 과보를 줄이는 방법도 제시를 하고 있다. 업은 이루어지고 나면 그 과보는 결정이 되어 나타나지만, 개인의 노력에 의해 조금 다른 과보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에 비유를 한다. 한 잔의 물에 소금을 한 덩어리 넣으면 마실 수 없지만, 같은 소금을 갠지스강에 넣으면 그 맛이 달라져서 마실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업은 다른 업으로 인해 희석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업을 짓게 되었어도 좋은 업을 많이 쌓으면(積善), 악업이 희석된다는 것이다.

부처의 큰 두 제자였던 앙굴리말라(Angulimala)와 마우드갈랴야나(Maudgalyayana-目連)의 경우에서 우리는 업에 대한 수행자들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앙굴리말라는 많은 살생을 한 전적이 있는 부처의 제자이다. 어느 날 탁발을 하러 갔다가 원한을 품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돌에 얻어 맞고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돌아온다. 부처는 “너는 그것을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전에 지은 업에 대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통력제일이었던 마우드갈랴야나도 탁발을 하러 갔다가 다른 종파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다. 그때 가장 친한 친구인 샤리푸트라가 죽어가는 그에게 “친구여, 부처의 제자 중에 신통이 제일인 당신이 왜 신통으로 피하지 않았소” 라고 묻는다. 그러자 마우드갈랴야나는 “내가 본래 지은 업은 매우 깊고 무겁소. 그것을 갚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소”라고 대답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 두 이야기는 업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리고 해탈을 향한 수행의 처절함도 말하고 있다.

다음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주체를 살펴보면서 대승불교로 들어가 보자.
출처 : 코리안아쉬람
글쓴이 : akles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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