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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반(nirvana, parinirvana)이란 무엇인가. samsara 12

할로태산 2012. 12. 3. 18:11

 

윤회이론

 

열반(nirvana, parinirvana)이란 무엇인가.

 

  붓다(Buddha)의 모든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에 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팔정도[1]를 제시했다. 팔정도는 초기불교에서 강조되는 三學[2]으로 요약된다. 팔정도는 순서대로 실천하도록 되어 있다. 정견이 제대로 될 때 정사유를 할 수 있고, 정사유가 제대로 될 때 정어를 할 수 있다. 나머지 들도 순서적으로, 단계적으로 닦아야 한다.[3]  최종단계는 正定에 이르는 것이다. 나머지는 正定을 얻기 위한 준비단계일 뿐이다.

 

正定은 다시 4단계로 나누어진다. 이른바 四禪이다.[4]

가)   1 을 떠나 (vitaraka: 거친생각)도 있고, (vicara: 세밀한 생각)도 있으면서 번뇌를 떠남으로써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된다.

나)   2 이 쉬고 마음 속이 고요하고 일심으로 도 없고 도 없어 에서 즐기게 된다.

다)   3 기쁨과 욕심을 떠나고, 모든 것을 버리고 구함이 없음에서 노닐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몸의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라)   4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어지고 기쁨과 근심의 근본이 이미 없어져,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생각을 버리고 청정하게 된다. [5]

 

4에 도달하면 우리의 실상, 즉 무아(anatman)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존재의 한계상황인 , 그리고 그 원인인 욕망은 가 존재한다는 착각 때문이다. 따라서 선정을 닦아 마음을 고요히 하면 우리의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윤회의 원인은 (karman)이라는 일반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慾望이었다.[6] 따라서 慾望을 만들고, 은 윤회의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욕망을 제거하면 中性(無記化)이 되어서, 더 이상의 윤회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涅槃에 이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유일한 목적은 욕망을 소멸시키는 것이다.”라는 정의가 가능하다. 불교는 욕망을 소멸시키는 방법으로 中道의 길을 제시한다. [7]중도라는 표현은 精進을 너무 심하게 하면 마음이 평정되지 못하고, 정진을 너무 태만하게 하면 사람이 게으르게 되므로, 수도의 균형을 취하라는 뜻이다.

 

중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서 제시해 놓은 것이 팔정도인 것이다. 팔정도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해탈로 인도하는 것, 즉 열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열반(nirvana)은 불교에서만 쓰이는 용어가 아니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도 사용이 된다. 그러나 이들 다른 종교에서는 목샤’(moksa 해탈) 또는 묵티(mukti 해방)라는 말도 함께 사용한다.

 

그러나 불교는 열반이라는 단어에 집착을 하고, 열반은 거의 불교의 용어로 고착화 되어 있다. 그러면 불교의 경전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열반의 의미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학자들은 열반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의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런 노력들은 오히려 열반의 의미를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열반은 언어로써 완전하고도 만족스럽게 정의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리의 언어는 너무나 빈약해서 열반과 같은 절대적인 진리 또는 궁극적인 실재의 진정한 성질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빈약함을 전제로 해서라도, 우리는 나름대로 열반의 정의를 내려 보도록 하자.

열반은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경지를 말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번뇌나 를 소멸한 이상적인 경지라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부처 같은 성인의 죽음을 의미한다.

 

열반이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역사적 배경에는 불교탄생 이전의 고대 인도사상의 두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在家생활의 정통 바라문사상과 출가의 遊行[8]의 문화를 짚어 봐야 한다.

 

베다를 계승하는 바라문사상은 儀式, 儀禮를 중심으로 카스트제도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추구 했다. 그리고 반복되는 윤회 속에서 좋은 업을 쌓아 來世를 준비하는 종교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의 흐름 속에서 일부의 바라문들은 의식행위의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알려고 했고, 현세의 질서와 거리를 두고 개인적인 구원(구제)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카스트제도라는 사회적인 시스템에서 벗어난 遊行자들이 위의 조류에 합류하면서 沙門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된다. 물론 이때의 인도의 문화 경제는 사문들을 지탱해 주었다. 僧伽(samgha)는 불교이전에 활성화 되어 있었다. 불교의 탄생도 이런 사회적인 배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부처 역시 사문의 한 사람으로 출발했다.

 

사회적인 가치관에서의 개인이 아니고,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순전히 개인적인 해방을 목표로 종교관이 형성된 것이다. 열반은 이런 사문들의 움직임과 함께 하는 개념이다. 해탈(moksa)이나 寂靜(santi)와 같은 동의어도 이런 배경이 있다.

 

우리의 텍스트는 열반을 크게 두 개의 범주에서 정의하고 있다. 본래 열반의 의미는 이상적인 경지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고 있었으나, 佛滅이라는 대사건을 겪으면서 聖人의 죽음을 의미하는 뜻이 크게 확대가 된다. 불교도들은 부처의 죽음을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었고, 이런 생각은 점차적으로 같은 열반이라도 생존 중에 다다른 열반을 有餘涅槃(sopadhisesa nirvana)이라고 하고, 유여열반에 이른 이가 육체를 떠난 상태를 無餘涅槃(anupadhisesa nirvana, nirupadhisesa nirnava)라고 칭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육체가 있는 한은 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깨달음은 육체까지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부처의 入滅은 무여열반을 달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사건이 아니고, 완전한 이상의 실현된 것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 된다.

 

초기불교의 열반경에는 부처가 無餘涅槃界에서의 實在를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탑(stupa)중심의 무불상시대에는 佛塔 그 자체가 이상적인 부처의 현존을 의미했다.

 

부처가 말하는 열반의 의미는 부처 특유의 對機說法[9]으로 인해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초기경전 즉 우리의 텍스트에서 말하는 열반의 의미는 논리와 추리를 넘어선 영역이고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실현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부처가 가르친 길을 따르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1] 八支聖道(Ariyo atthangiko magga)

여러 경전에서 말하는 팔정도는 조금씩 내용을 달리 한다. 우리는 잡아함”(28,784)의 내용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正見(samyagdrsti) –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그리고 거기에 따른 果報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말한다.

     正思惟(samyaksamkalpa) – 탐욕이 없는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이다. 바른 사유의 법칙에 따라 생각하는 것.

     正語(samyakvac) – 거짓말(妄語)을 하지 않는 것이간시키는 말(兩舌)을 하지 않는 것, (惡口)을 하지 않는 것, 아첨(綺語)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올바른 언어적 행위.

     正業(samyakkarmanta) – 살생과 도둑질과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올바른 행위.

     正命(samyagajiva) – 衣服, 飮食, 臥具, 湯藥을 제대로 하는 것. 올바른 생활.

     正精進(samyagujayama) – 꾸준히 힘써 번뇌를 떠나려 하고,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물러나지 않게 올바른 노력을 하는 것이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는 것.

     正念(samyaksmrti) – 바른 기억으로 생각을 따르고 잊지 않으며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正定(samyaksamddhi) – 올바른 정신집중으로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고, 마음 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2] 三學

 

三學

(sila) – Health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Samadhi) – Attention

正念, 正定

(panna) - Knowledge

定見, 正思惟

 

[3]중아함”(47,179)에서 正見을 말미암기 때문에 正思惟가 생기고, 정사유를 말미암기 때문에 正語가 생기고(…)正念을 말미암기 때문에 正定이 생기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4]중아함”40(1576).

[5]무아, 윤회문제의 연구윤호진 1992, P131~P132.

[6]잡아함” (13,334), “어리석음이 구하고 욕심내는 것을 욕망이라 부르고, 욕망이 짓는 것을 업이라 부른다.”(癡求欲名爲愛, 愛所作名爲業) 이 구절에서 우리는 욕망이 업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중아함” 56, “증일아함”10.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배워서는 안 될 두 가지 치우친 이 있으니, 하나는 욕심과 향락의 하천한 업으로서 凡人의 행에 집착하는 것이요, 그 두 번째는 스스로 번거로워하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은 성현의 이 아닌 것이다. 다섯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치우친 행을 버리고 중도를 취하면 밝음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며, 을 성취하여 自在를 얻고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

[8] 사문(沙門 sramana) – 주로 갠즈스강 중류지역의 부족국가를 유행하던 유세객들의 일반명칭. ‘노력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9] 對機說法 부처는 듣는 사람의 이해능력에 맞추어 진리를 설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의 말들은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이점 때문에 중국불교는 敎判을 해서 부처의 말을 이해하려 했다.

출처 : 코리안아쉬람
글쓴이 : akles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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