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스크랩] 견성성불

할로태산 2012. 12. 3. 18:12

 

견성성불

-       대승불교의 부작용

 

불교는 出家者 중심의 소승에서 在家信徒 중심의 대승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중심(dharma)에서 신앙중심(sraddha)으로 바뀐 것으로, 수행보다는 신앙심을 강조하게 된다.

 

대승은 대중운동으로 불교의 확산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대중화에 따른 여러 부작용은 불교의 본래 모습을 상실케 할 수도 있다.

 

대승불교문화의 복판에서 우리 스스로 그 부작용을 짚어보도록 하자.

 

대승운동이 일어나면서 불교자체적으로 그 변질을 막기 위해 기원전후세기부터 반야사상이 나왔다.

탑중심의 무형상주의의 불교에서 불상중심의 형상주의로 불교가 옮겨 가면서,

불교는 초월주의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를 띠게 된다.

반야사상은 이런 시기에 나온 것으로 불교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반야사상은 불경들이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AD2세기경부터 중국문화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인도문명에 흡수될 만큼 빈틈이 많은 문명은 아니었다.

따라서 중국은 불교를 자체적으로 해석(interpretation)하고 중국역사 속에서 불교를 받아드렸다.

중국에는 이미 삼보설화에서 시작되는 황제내경이나 노장사상 그리고 공자의 가르침이 문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전개 되는 과정에서 가장 의미가 있는 사건(historically significant event) 이다.

 

공자의 합리적인 인생관이 지극히 현세적인 것이라면,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있다.

그래서 노자의 사상은 실천적이고 체험적이 아닌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다운 종교가 없던 중국에, 불교는 정확한 교리를 갖고 설득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불교가 노장사상의 전통으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고,

그 결과 이라는 대승불교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은 붓다의 가르침 이외로 따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敎外別傳).

이것은 敎學이 아니라서 以心傳心을 강조한다.

따라서 不立文字를 표방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公案(공문서라는 뜻)이라는 확실한 문건을 남기고 있다.

또 공안에 담긴 승려들의 이야기를 禪宗에서는 헌법과 같은 기준으로 삼고 있다.

 

바로 네가 부처다라는 제일명제를 대승불교는 주창(主唱)한다.

소승에서는 授記(vyakarana)를 받은 선택된 존재가 成佛을 달성한다는 개념이 강했으나,

대승에서는 불성(Buddha dhatu)이 내재한다는 신념을 강조한다.

이 말은 불성이 내재한다는 믿음(sraddha)을 강조한 것이다.

 

見性의 논리는 사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心性本淨) 그런데 無名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악업에 물들여진() 구름을 걷어내면 佛性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불교의 무아론과 심각하게 상충된다.

불성을 가리고 있는 욕망을 걷어내면 네가 곧 부처다라고 하는 것은 불성의 내재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佛性이론은 無我論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지만, 그 논리의 근거는 여래장경[i]에서 찾을 수 있다.

여래장[ii]이 곧 불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 한 것이다.

 

여래장론을 체계적으로 풀어놓은 논서가 『대승기신론』[iii]이다.

『여래장경』에서는 如來藏을 순수한 붓다의 로써 그 오염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여래장 또한 다른 것에 물들 수 있다고 한다(染淨相資, 染淨互薰).

그래서 여래장연기를 강조한다 

여래장은 절대적으로 깨끗한 상태로 인간의 본성으로 보장 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래장은 결국 존재론적으로 보장 된 불성이 아니라, 우리가 실천적으로 얻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라는 말은,

 대승의 열반경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소승의 열반경은 성격을 달리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문화에서,

특히 에서 쓰이는 아주 독특한 불교용어인 見性成佛이란 말이 곧 불교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닦음()의 종교이다.

漸進的인 것으로, 순간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은 불교가 중국의 道家문화에 흡수된 특이한 케이스(格義佛敎)이다.

역사적으로 중국문명권의 하위에 있는 한국이나 일본은 중국불교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가 불교는 곧 이라는 공식이 만연해진 것이다.

 

중국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의 경전을 중국 고유의 이해방식으로 분류를 했다.

이것을 敎相判釋라고 .

 

중국 수()나라의 승려 지의( 538~597)判敎는 그 끈질긴 생명력을 아직도 자랑한다. 지의 교판에 따르면,

1.      1시로 화엄경을 제일 먼저 설했다. (아침시간때)

2.      그러나 화엄경이 너무 어려워서, 鹿苑時(阿含時)를 인도의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아함경』을 설했다.

3.      방등시(方等時)로 정오에 『유마경』『승만경』을 설한 때.

4.      반야시(般若時)로 『반야경』을 설한 때.

5.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 『법화경』『열반경』을 설한 때.

 

이상이 천태지의가 붓다의 말들을 5가지로 분류한 방식이다.

지의의 교판에서는 소승경전이고 붓다의 본래 모습을 가장 가깝게 알 수 있는 『아함경』은 중요 위치에서 벗어나 있다.

 

지의의 교판은 중국의 승려가 중국의 문화에 맞추어 불교를 이해하려 불경들을 분류한 방식일 뿐이다.

지의의 교판이 한국에 그대로 맞추어 진다면, 한국은 아직도 중국의 문화권에 예속되어 있다는 반증일 뿐이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다. 따라서 지켜야 할 계율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계율을 지키며 사는 것보다 부처의 자비에 의지를 한다.

결국 불교는 기복신앙으로 자리잡은 부분이 많다.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진리추구의 방법이 자신에게 쉬운가 어려운가를 따지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변할 수 있는 가, 없는 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i] 如來藏이라는 말이 최초로 기술된 경전. 법거(法炬:290∼312)에 의해 초역되었다.

[ii] 여래장(Tathagata garbha)이라고 하는 如來를 일체의 중생은 가지고 있다.

[iii] 大乘起信論(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ayana) – 글자 그대로 대승에 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論書이다.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어서 끊임없이 위서라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550년경에 진제(Paramartha 499~569)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 코리안아쉬람
글쓴이 : akles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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