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불교란 부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인 불경들을 살펴 보면, 그 자료들은 실로 방대하다.[1]
많은 논사들이 지은 논장들, 그리고 다른 문자권으로 번역되면서 생기는 異譯[2]들이 합쳐졌다.
따라서, 부처 이후 약2500년의 역사 속에서, 불교는 복잡다단해졌고, 각 문화권에 토속화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불교답게 유지시켜온 일관성이 변질된 것은 아니다.
불교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불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몇 개로 압축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漢字불교의 영향으로 불교를 어렵게 받아드릴 수 있다.
부처의 땅, 인도의 현재나 과거의 언어들은 우리 한국말처럼 소리글이다.
그러나 중국어는 단음절의 뜻글자(Monosyllabic language)이며, 성조(Tonal language)가 있다.
따라서 중국의 언어체계와 중국의 선진문명[3]이 합쳐지면서, 중국은 불교를 중국화(禪)시켰다.
그러나 중국이 자국의 문화에 맞춰 불교를 이해했다고 하지만,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를 퇴색시킨 것은 아니다.
불교의 기본 자료(text)를 살펴보면,
부처의 가르침은 ‘苦[4](duhkha)로부터의 자유’라고 정의 내려진다.
따라서 불교의 모든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하나의 초점에 맞춰져 있다.
부처(Buddha)는 모든 것이 괴로운 상황(sarvam dhukahm)[5] 에서 자유로워 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가르쳤다.
부처의 방법이란, 우선 苦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텍스트에서는 苦의 원인을 다시 분류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 원인은 인간의 욕망이다.
결국 욕망이 없으면 苦도 없다.
그리고 이 욕망에도 원인이 있다.
욕망이 원인은 ‘나’가 있다는 생각이다.
결국 ‘나’가 있다는 생각이 苦의 뿌리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나’를 철저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를 알아본 결과 ‘나’라는 것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요소가 임시적으로 모여서 이루어진 실체가 없는 존재, 즉 무아적인 것이었다.
우리들의 존재가 무아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드린다면, 더 이상 어디에도 집착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면 우리의 욕망도 사라지게 된다.
욕망이 사라지면 苦도 사라진다.
苦에서 해방이 되면 더 이상 업(karman)을 만들지 않게 되고, 그러면 윤회의 굴레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오늘은 불교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부처는 불교를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확인이라고 설명한다.
다음에서는 부처가 확인한 무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1] 그리스도교의 신약27편은 불교에 비교해 보면, 실로 간단한 문헌이다.
[2]이역-산스크리트 원문 텍스트가 역사적으로 다른 시기에 중복되어 번역되는 것.
[3] 선진시대,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의 오랜 역사를 가린킨다.
[4] 부처가 말한 두카(dukkha)를 苦(suffering)로 단순 번역해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두카의 반대어는 樂이 아니다. 樂도 두카의 범주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두카의 반대어는 산티(santi, nirvanam santam 평화)가 된다. 우리 존재의 한계상황을 총칭해서 苦라고 표현했고,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을 두카라고 했다. 즉 無常(anicca)한 현실이 곧 苦인 것이다.
[5] 一切皆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