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karman)과 마음
불교만큼 業(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체계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사성제와 연기이론도 결국은 팔정도라는 ‘행위’가, 그 결론이다.
우리의 텍스트는 업을 세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몸(kaya)과 언어(vaca) 그리고 마음(manas)이다.
이것은 육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 그리고 정신적 행위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려움들을 이해하려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어떤 신비한 힘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자신은 우리의 습관적인 경향(behavior pattern)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불행을 반복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부처의 설법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내 행위(behavior pattern)는 무척이나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래서 무엇이 내 행위이고,
도대체 어떤 행위가 업을 쌓고 果報를 받는지를, 불교는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육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 그리고 정신적 행위를 분류하고 보면, 육체적 행위가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이 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 진리를 탐험해 들어간 사람들은, 육체나 언어적 행위보다는 정신적 행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육체나 언어적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결과를 드러낸다.
이들 행위 이전에는 마음이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음에서 시작된 행위가 점차적으로 강해지면서, 언어나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적 행위나 육체적 행위는 정신적 행위의 투사에 다름이 없다.
이것들은 단지 정신적 행위의 강도를 측정하는 잣대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아주 싫은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면, 욕이 나오고 그 사람을 실제로 죽일 수도 있다.
이런 비윤리적인 행위뿐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측은한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면, 따뜻한 말을 해주고, 실제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비윤리적이든 아니면 윤리적이든, 이것들은 정신적인 행위의 투사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마음의 작용’은 불교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業의 생성과 직결된다.
따라서 불교의 과보는 정신적인 행위의 결과이다.
이것은 곧 우리 마음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마음은 무엇이며, 또 그 작용은 어떠한지를 알아야 한다. [1]
우선, 우리 마음의 주된 4가지 부분을 살펴보며, 그들이 어떡해 작용하는지를,
부처의 말을 빌어 설명해 보자.
마음의 첫 번째 부분은 識(consciousness)이다.
마음의 첫 번째 부분인 의식의 역할은 말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마음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여섯 개의 識을 갖고 있다.
이것은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그리고 意識을 가리킨다.
어떤 형태나 빛이 눈과 접촉해서 안식이 일어난다. 어떤 소리가 귀와 접촉해서 이식이 일어난다.
냄새가 코와 접촉해서 비식이 일어난다. 맛이 혀와 접촉하여 설식이 일어난다. 만져질 수 있는 것이 몸과 접촉하여 신식이 일어난다. 그리고 생각이나 감정이 마음과 접촉하여 의식이 일어난다.
이 六識의 역할은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의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리가 귀와 접촉하면 이식이 일어나면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마음의 다음 부분을 건드린다.
마음의 두 번째 부분은 想(perception)이다.
‘상’의 역할은 인지하고 판단하는 부분이다.
소리가 귀와 접촉했다. 마음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귀에서 뭔가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뿐이다.
그러나 마음의 두 번째 부분의 인 ‘상’에서는 그것이 뭔가를 알아내려고 한다. 자기 경험과 기억 속에서 그것을 반추해내려 한다. 그래서 그 소리가 자신을 비난하는지, 또는 칭찬하는지, 평가를 내린다.
마음의 두 번째 부분인 ‘상’이 어떤 평가를 내리면, 즉시 마음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마음의 세 번째 부분은 受(sensation)이다.
‘수’의 역할은 느끼는 것이다. 몸에 일어나는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다.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아주 좋은 느낌, 유쾌한 느낌이 일어난다.
반대로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아주 나쁜 느낌, 불쾌한 감각이 일어난다.
마음의 세 번째 부분은 몸의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각을 경험한다.
이러한 감각들은 즉시 마음의 네 번째 부분을 불러 일으킨다.
마음의 네 번째 부분은 行(volition)이다.
‘행’의 역할은 반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반발 또는 반작용으로 실제적인 행위가 된다.
팔리어로는 ‘상카라’라고 한다. 우리의 평정심(equanimity)을 깨는 것이 바로 상카라이다.
상카라가 業의 주원료이다.
마음의 첫 번째인 의식은 행위가 아니다. 두 번째인 ‘상’도 단지 인지하고 인식하기 때문에 행위가 아니다. 세 번째인 ‘수’도 단지 느낌이기 때문에 행위가 아니다. 이것들은 業을 짓지 않는다.
그러나 상카라, 즉 반응하는 부분은 우리의 습관적인 경향(behavior pattern)을 반복시킨다.
칭찬의 말이나 유쾌한 감각을 쫓아, 계속 갈망하며 집착하게 된다.
비난하는 말이나 불쾌한 감각에는 혐오와 증오로 반응한다. 싫은 것을 제거하려고 끊임없이 집착한다.
따라서 상카라는 정신적 행위의 결과를 맺게 한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화를 내거나, 증오하거나, 탐심을 일으키거나, 공포를 느끼거나, 갈증을 느끼거나, 의기소침하게 될 때, 우리는 반복적으로 상카라를 만들어 내면서. 그것들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우리 내면 깊숙이 뭔가가 일어날 때마다 어떤 감각이 생기게 된다.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게 된다.
그 반응에 의해서 또 다른 감각이 일어나게 된다. 다시 그 감각에 반응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습관적인 경향(behavior pattern)이다.
부처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습관적인 경향을 바꾸라고 이야기 한다.
다시 한번, 부처의 말을 정리를 해 보자.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우리 내면의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마음의 첫 번째 부분은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두 번째 부분은 평가를 내리기 시작한다.
이 평가는 감각, 즉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즉 감각이 유쾌하든, 불쾌하든, 반응을 하지 않는, 즉 영향을 받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의 습관적인 경향을 바꾸는 길이다.
결코 이런 노력의 성취가 쉽지는 않은 것이지만,
노력이 더해질수록 반응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상카라는 약해진다.
오늘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용어인 業이라는 단어를 우리의 마음과 함께,
초기불교적인 관점에서 이야기 해 보았다.
이후의 유식사상에서는 좀 더 심층적으로 우리 마음을 분석해 들어간다.
짧게 쓰려 했지만, 일천한 논술 실력 탓에 글이 길어졌다.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1] 부처는 정신적, 육체적 구조 전체를 점검했고, 그 결과 육체는 8가지의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나누고 쪼개서 분석한 결과, 121가지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52개의 정신적 내용물(불순물)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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