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우리는 살아갈 것인가?
- 김태길교수의 윤리학 강의노트
윤리학은 사실판단[1]이 아닌, 가치판단[2]을 다룬다. 가치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이다. 이 말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에 가치판단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자유, 평화, 평등, 행복 등등의 문제가 윤리학(ethics)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윤리학은 철학의 한 분야이다.
철학은 세가지 분과로 분류 된다.
1. 형이상학(metaphysics): 우주는 어떻게 생겼나(우주론), 존재의 근원은 정신적인 것인가? 물질적인 것인가? (존재론), 정신과 육체의 관계.
2. 인식론(epistemology):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참과 거짓의 구별은 무엇인가? 인식의 한계, 인식하는 방법 등. (지식의 문제)
3. 윤리학(ethics):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훌륭함과 그렇지 않음은 무엇인가? (가치의 문제)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곧 행위 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는 좋은 행위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구분이 된다. 이것은 사회규범(social norms)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규범은 세가지로 구분된다.
1. 관습(custom): 자연스럽게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진다.
2. 법(law): 통치자나 입법부에서 만든다.
3. 윤리, 도덕률(ethical code)
위 세가지중에 관습과 법은 인위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man-made)인가? 또는 인간에 내재하는 선험적인 법칙(transcendental law)인가? 이 문제는 도덕이나 윤리의 근거를 묻는 질문으로 윤리학의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윤리의 본질을 묻기 전에 윤리현상(ethical phenomena)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거짓말은 나쁘다고 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다. 또는 남자의 방탕한 성생활보다는 여자의 품행을 더 엄격하게 평가한다.
그러나 윤리현상은 인간의 평가(valuing)에서 비롯된다. 평가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따지고 보면 본성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좋다’라고 평가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나쁘다’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윤리현상은 인간의 평가 때문에 생겨나고, 평가는 인간의 본성에 의해 자지우지 된다. 그래서 인간의 평가 때문에 ‘잘했다’ 또는 ‘못했다’ 라는 평가와 ‘옳다’ 또는 ‘그르다’라는 판단이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인 평가라는 것도 타당성이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여자의 재혼을 금기시했으나, 요즘에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 드려지고 있다. 그래서 도덕적인 평가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규범이라는 것은 시대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3]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해야 할 행위와 해서는 안될 행위가 구분이 된다. 사회의 혼란을 야기시키는 행위보다는,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행위를 지향하게 된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도덕률이나 윤리의 객관적 근거나 권위는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지 않는,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 윤리는 그 존재여부가 불투명하다. 그 시대, 그 사회에 통용되는 윤리는 있지만,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 통용되는 윤리, 그리고 늘 타당한 윤리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도덕률은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불완전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도덕률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플라톤(Plato)의 이데아(Idea)론 까지 연결이 된다.
개체적 인간(individual man)이 완전한 인간(ideal man)을 추구하는 염원을 에로스(Eros)라고 한다. 소크라테스 이후부터 서양의 철학은 절대 타당한 윤리규범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탐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절대윤리의 주장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목적론적 윤리설(teleological ethics)은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객관적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적에 부합하면 善이고 그렇지 않으면 惡이다. [4]
플라톤은 목적을 이데아(idea)에 설정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행복),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설정했다. 이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라는 것은 쾌락이나 명예 그리고 재산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하는 기능인 ‘이성’을 충분히 발현하는 상태를 말한다.
밀(J.S.Mill)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목적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주의는 쾌락주의(hedon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법칙론적 윤리설(deontological ethics)은 목적을 설정하지 않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또 지켜야 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I.Kant)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은 법칙론적 윤리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의 十誡命이나 유교의 三綱五倫사상은 법칙론적으로 누구나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판단이나 진위판단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목적론적 윤리설이나 법칙론적 윤리설이라도 인간의 지켜야 할 마땅한 목적 또는 법칙을 논증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삶의 최고의 목적을 논한다는 것은 최고의 원리를 논한다는 말이다. 연역법(deductive)으로 설명하려면 최고보다 더 높은 전제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최고의 목적에서 연역되어진 것은 최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납법(inductive)으로도 초경험적인 도덕률을 경험적인 사례로 귀납시켜 증명하기 어렵다. 도덕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학설은 만들기는 대단히 어려우나 그것을 비판하기는 매우 쉽다.
그래서 윤리는 증명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주고 감화되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윤리체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윤리는 절대적 진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절대적인 윤리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윤리적 회의론(ethical skepticism)이 휩쓸었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살면 되고, 자신만 편하면 된다는 가벼운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의론은 경험과학(empirical sciences)의 발달로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거가 없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론의 극복을 위해서 종교적 신앙이 회자되었다. 신앙의 태도로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것들도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5]
현실에서 윤리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착하게 살아도, 자신한테는 피해가 더 클 수가 있다. 그래서 윤리에 대해 심각한 회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윤리기준이 없기 때문에 종교에 의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 절대주의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윤리적 절대주의를 부수고 나온 윤리적 상대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의론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윤리를 삶의 지혜로 유용하게 이용한다는 것이다. 윤리라는 것이 엄밀하게 논증된 체계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평화롭게 만드는 실용적인 가치는 있다는 것이다.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과 쌍벽을 이루는 메타윤리학(meta-ethics)은 윤리학이 진짜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 라는 질문으로 생겨났다. 이 말은 “거짓말은 나쁜 것이고 정직이 좋은 것이다.” 라는 윤리적 평가언어(value statements)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윤리학 이전의 근원적인 것을 밝히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은 타율적으로 강요되는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윤리는 개개인의 자율적인 사고를 전제로 한다.